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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쳐야...노회찬이 옳았다

ⓒ 오마이뉴스

 

미국의 중재도, 한·일 외교장관 회담도, 국회 방일의원단의 의원외교도 별다른 소득이 없다.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로 촉발된 한일 외교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일본 정부가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의 대응에 촉각이 쏠리고 있다.

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한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은 일본이 분쟁을 멈추고 일정 기간 현상 유지에 합의할 것을 촉구하는 미국측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조 차관은 "일본 입장이 완고하고 강경하다"며 "미국의 설득 노력에도 좀처럼 입장을 변화시키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대를 모았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의 외교장관 회담도 서로 간의 입장차이만 확인한 채 끝이 났다. 태국 방콕에서 열리고 있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 중인 양국 외교수장은 1일 경제보복 조치 이후 처음으로 만나 협상에 임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강 장관은 이날 50분간 진행된 회담 직후 기자들과 만나 수출규제 철회, 화이트리스트 제외 절차 중단·보류 등을 요구했으나, 고노 외무상으로부터 확답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일본을 방문했던 방일의원단 역시 외교적 해법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 방일의원단은 1박 2일 동안 일본 의회 관계자들을 만나 수출규제 및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 철회를 촉구하는 외교를 펼쳤지만 일본측으로부터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일본의 집권여당인 자유민주당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과의 회동은 끝내 불발됐고,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유감을 표명하는 등 한·일간의 확연한 인식 차이를 드러냈다.

당초 미국의 중재와 정부·국회 차원의 외교적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분쟁 해결의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이 강경 태도를 고수하면서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ARF에 참석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을 열어 중재에 나설 뜻을 시사했지만, 일본이 입장을 바꿀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당분간 출구 없는 평행선을 달릴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일본은 한·일 기업들이 조성한 기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자는 우리 정부의 안을 거부한 데다, 외교채널을 통한 협상 역시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교토통신>에 따르면 고노 외무상은 강 장관과의 회담에서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가 안보를 목적으로 한 정당한 행위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한·미 양국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외려 화이트리스트 배제 등 추가 보복 조치를 통해 한국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다. 한국을 상대로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대응책을 고심 중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당시 일본과 체결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 장관 역시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고노 외무상과의 회담 직후 강 장관은 "내일 (화이트리스트 배제) 각의 결정이 나온다면 우리로서도 필요한 대응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를 했다"며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원인이 안보상 이유로 취해진 거였는데, 우리도 여러 가지 한·일 안보의 틀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강 장관의 발언은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할 경우 지소미아 파기를 검토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강 장관은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 현안보고 자리에서도 지소미아와 관련 "지금은 유지하고 있는데, 앞으로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검토를 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이 지소미아 유지에 도움이 안 된다는 목소리는 방일의원단 내부에서도 나왔다. 원유철 자유한국당 의원은 "일본의 스가 관방장관이 지소미아 유지 필요성을 얘기하는데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라며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 전략물자 수입에 장애가 생기고, 그러면 군사 정보자산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생겨서 지소미아 기능, 효율성이 낮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소미아 유지를 위해서도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병력 이동과 동향, 북 핵·미사일 관련 정보 등을 일본과 공유하기 위해 맺은 지소미아는 1년마다 갱신되는 협정으로 한쪽이 파기 의사를 밝히지 않는 이상 자동적으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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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지소미아를 파기할 경우 일본의 대북 정보 수집에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 정부가 경제보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지소미아의 유지·연장을 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달 29일 "양국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안보 분야의 협력과 연대를 강화해 지역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며 지소미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부가 오는 8월 24일이 기한인 지소미아 파기 카드를 검토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정부의 이같은 입장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명박 정부 당시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바 있는 지소미아는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체결돼 지금도 논란이 적지 않다.

청와대도 분주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1일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해 대책 마련에 돌입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정부는 일본의 조치에 맞서 다양한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을 내리더라도 발효 시점이 3주 뒤인 점을 감안해 외교적 해결을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는 블룸버그, 월스트리트저널, FT 등 외신은 물론 일본 자국 언론으로부터조차 자유무역 원칙과 세계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비판 받고 있다. 국제법 위반일 뿐 아니라 사법적 판결을 정치·경제 문제와 연결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삼권분립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명분이 없을 뿐더러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기도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국 조야와 경제계, 외신들이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를 비판하는 본질적인 이유일 터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와 용서, 적절한 보상과 배상이 없이는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는 난망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관계 수립을 위해서라도 아베 정권은 경제보복 조치를 즉각 철회해야 마땅하다.

정부는 정부대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외교적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되, 일본의 후속 조치에 대한 만반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내부 분열이다. 많은 국민들이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 조치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권과 언론이 아베 정권을 편드는 듯한 행태로 국론 분열을 부추기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JTBC 손석희 앵커는 지난달 22일 '앵커 브리핑'에서 노회찬 전 의원의 발언을 소개해 세간의 화제가 됐다. 제19대 총선 당시 야권연대를 비판하는 여당 의원을 향해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하던 노 전 의원의 그 유명한 '외계인' 비유다.

일본이 지금처럼 비상식적 도발을 이어간다면 한·일 갈등은 당분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파국은 막아야겠지만 피할 수 없다면 결코 물러나서도 안 된다. 외교·안보에 여야·정파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총성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정파 논리는 그 다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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