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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스모킹 건' 된 수첩..박근혜도, 양승태도 '수첩'에 무너졌다

ⓒ 오마이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수첩공주'라는 별칭이 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대표로 취임한 이후 붙여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요 현안에 대해 말할 때 수첩에 적힌 내용대로 따라 한다 해서 생긴 달갑지 않는 수사다. 그러나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던 이 별칭은 이후 이미지 쇄신 작업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11년 10월 '수첩공주'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여러분의 좋은 의견을 잘 듣고, 잘 적고 반드시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며 이미지 개선에 나섰다. 수첩에 메모하듯 여러 의견을 잘 경청해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취지였다. 새누리당(현 한국당) 역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수첩공주'라는 별명은 '원칙, 신뢰, 약속'의 상징이 됐다"며 적극적인 홍보를 펼치기도 했다. 

이후에도 박 전 대통령은 수첩을 가까이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그는 '원칙, 신뢰, 약속'을 강조하던 대선후보 시절의 '수첩공주'가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은 불통인사를 고집하는가 하면,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권위주의적·독선적 국정운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수첩은 이후 불통과 독선의 상징이 됐다.

수첩은 박 전 대통령을 파국의 수렁으로 밀어넣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참모들이 박 전 대통령을 따라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한 것이 훗날 사달이 났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노트에는 K스포츠·미르재단 모금을 비롯해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었다. 이 기록들은 박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혐의 중 뇌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강요죄 등을 입증할 주요 단서가 된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의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안 전 수석이 작성한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지난해 4월 6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기업총수 등 외부인과 독대가 끝나면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을 불러 대화내용을 불러주고, 안 전 수석이 그대로 받아 적었다"며 "수첩기재 사항이 외부인과의 독대 내용을 전적으로 증명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박 전 대통령과 안 전 수석 사이에 독대내용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는 점은 인정된다"고 적시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적혀있는 '안종범 수첩'이 직접증거는 될 수 없지만 간접증거는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항소심 역시 같은 판단이었다. 

지난해 8월 24일 열린 항소심에서 서울고법 형사4부(김문석 부장판사)는 "(수첩의 내용은) 박 전 대통령이 어떤 내용의 지시를 했다는 안 전 수석의 진술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진술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2심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부분에 대해서만 증거능력을 인정했고, 기업 총수들과의 면담 내용을 받아적은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안종범 수첩'은 '태블릿PC', '캐비닛문건'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의 유죄를 입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스모킹 건'으로 손꼽힌다. '수첩공주'라 불릴 만큼 수첩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던 박 전 대통령이 바로 그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을 듯 하다. 


ⓒ 오마이뉴스


그런데 '여기', 수첩으로 인해 또다시 곤경에 빠진 사람이 있어 주목된다.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24일 새벽 2시 "범죄사실 중 상당부분의 혐의가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며 현재 수사진행 경과와 피의자의 지위 및 중요 관련자들의 관계 등에 비춰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구속영장 발부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법조계 및 정치권 안팎에서는 영장 발부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전직 대법원장이라는 점, 박병대·고영한 대법관에 대한 영장이 한차례 기각됐다는 점,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해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 행태가 지속돼 왔다는 점 등의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법원은 예상을 깨고 헌정사상 최초로 전직 사법부 수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파란을 연출했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한 요인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제 강제징용 소송 피고인(전범기업) 측 대리인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를 만나 소송을 논의한 문건, 개별 판사들에 대해 직접 'V'자를 표시해 불이익 조치를 내린 법관 인사조치 문건과 함께 지시사항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이규진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업무수첩이 결정적인 물증이 됐다는 분석이다. 박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양 전 대법원장 역시 '수첩'이 영장 발부에 커다란 역할을 셈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주요 사안을 꼼꼼하게 메모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법조계와 정치권을 훤히 꿰차고 있는 주진우 <시사IN> 기자는 지난 21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이 분이 굉장히 꼼꼼하신 분"이라며 "이 분의 별명이 양 주사다. 너무 꼼꼼해서, 너무 챙겨서. 그래서 아랫사람들도 자꾸 적어서 보고하게 됐기 때문에"라고 지적한 바 있다.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해 지시사항 등을 수첩이나 문건으로 남긴 것이 결국 문제가 됐다는 얘기다. 

알려진 대로 이 부장판사의 업무수첩에는 급 낮은 판사를 헌법재판관에 추천해 헌재의 권위를 하락시키고, 법원 출신 헌법재판관을 다시 대법관으로 임명해 법원의 입장을 대변하게 하는 등의 지시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검찰은 대법원장을 의미하는 '大'자가 곳곳에 표기되어 있는 이 수첩이 양 전 대법원장의 직접 지시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면서 사법농단 사건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될 것으로 보인다. 박·고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수사에 난항을 겪었던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범죄 혐의에 입증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사건의 최정점에 있는만큼 검찰은 보강수사를 통해 영장이 기각된 박·고 전 대법관을 비롯해 법원행정처 소속 전직 고위 법관들에 대해서도 기소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사법부의 위신과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90%에 달하는 영장 기각률은 '방탄사법부'라는 신조어마저 양산해 냈다. 세간의 예상을 깨고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을 결정한 이면에는 이처럼 법원을 향한 지독한 불신이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사법농단 사건 관련 영장이 줄줄이 기각되면서 사법부를 향한 국민적 분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직 대법원장 구속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건은 이제 재판을 통해 그 실체와 진상이 가려지게 됐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사법부 스스로 자초한 면이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런 면에서 극에 달한 사법 불신 풍조는 사법부가 처해있는 군색한 현실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터다. 책임을 통감하고,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이번 사태를 사법부를 일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인해 국가와 국민이 받은 상처가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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