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해외추태 예천군의회 보니..영화 <내부자들> 생각나

우연히 YTN <돌발영상>을 보게 됐다. '눈물의 예천군 회의장'이라는 제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일렬로 늘어선 의원들에게선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의원들도 있었다. 얼굴에선 착잡하고 무거운, 어딘가 주눅든 것 같은 표정이 묻어났다. 

같은날 같은 장소. 맞은편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연출됐다. 이날 예천군 의회 본회의장을 찾은 수십명의 군민들은 화가 단단히 난듯 야유와 냉소를 쏟아부었다. "사퇴하라", "절은 왜 하는데", "왜 우는데", "야, 이 와중에 선출을", "부의장 새로 뽑아서 뭐 하노?". 회의장은 의원들을 성토하는 군민들의 목소리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 오마이뉴스

고개 숙인 의원들과 그들을 비난하는 군민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어찌 아니 그럴 텐가. 지난 연말 캐나다와 미국으로 공무해외연수를 떠난 예천군의원들은 하루 아침에 유명(?) 인사가 됐다. 연수 도중 박종철 의원(무소속, 사건 이후 자유한국당 탈당)은 토론토에서 현지 가이드를 폭행했다. 권도식 의원(무소속)은 가이드에게 여성 접대부를 수소문했다. 의원들은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운 의혹도 받고 있다. 


사건이 알려진 이후 예천군은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의 하나가 됐다. 대한민국 의회의 수준과 민낯을 고스란히 노출시킨 예천군의원들을 향해 어벤져스 의회, 보도방 의회라는 비난이 솟구쳤다. 의원들에 대한 사퇴 압박과 함께 재발방지대책 요구가 빗발쳤다. 혈세낭비라 비판받아 온 의원들의 무분별한 해외연수를 이참에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분출됐다. 

그러나 정작 논란의 당사자인 예천군의회는 사건이 발생한지 한 달이 다 되도록 구체적인 수습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의원 전원 사퇴 요구를 받고 있는 엄중한 상황임을 잊은 듯 21일에는 신향순 의원(한국당)을 신임 부의장으로 선출하며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앞서 <돌발영상> 속 영상은 바로 이 장면을 편집한 것이다.

이날 예천군의회는 오전 11시 의회 본회의장에서 임시회 본회의를 열고 가이드 폭행으로 사의를 표한 박 의원에 대한 부의장 사임의 건을 통과시키고, 전원 무기명 투표를 통해 신 의원을 신임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어 징계 대상인 박 의원, 권 의원, 이형식 의장 등 3명을 제외한 나머지 6명으로 이뤄진 윤리특별위원회(윤리특위) 구성과 위원 선임의 건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예천군의회의 행보는 지역민심 뿐 아니라 일반 여론과도 배치된다는 평가다. 예천군의원들이 해외연수 도중 보인 추태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행태라는 지적이다. 예천군의회가 버티기로 일관하자 일각에서는 '예천군 농산물 불매' 운동까지 제기되고 있다. 예천군의회 홈페이지 '의회에 바란다' 게시판에는 예천군의회를 맹렬히 성토하는 글과 함께 지역 농산물 불매 운동 관련 글도 다수 게시돼 있다. 

그러나 예천군의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부의장으로 선출된 신 의원은 "저를 뽑아주셔서 감사드리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울먹였지만 이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본회의장 방청석에서는 이내 "부의장 돼서 뭐 할래", "감사할 일인가. 또 쓰레기 대표를 뽑아주는데" 등의 냉소적인 발언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 오마이뉴스


사건 발생 이후 군민들의 요구는 한결같다. 예천군의 명예와 자존심을 먹칠한 의원들이 자진해서 사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본회의장을 찾은 군민들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거세게 항의하며 사퇴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예천군의원들은 이날 부의장을 새로 선출하며 사퇴할 마음이 전혀 없음을 공공연히 드러내 보였다.

윤리특위 구성도 논란이다. 윤리특위는 징계 대상 3인에 대한 징계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구성됐다. 문제는 6명의 윤리특위 위원들 역시 해외연수에 동행했다는 것. 박 의원이 가이드를 폭행할 때 의원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술판을 벌이고 난동을 부렸다는 의혹도 있다. 그들 역시 국제적 망신살이 제대로 뻗힌 이번 파문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예천군의회를 향한 세간의 시선은 서늘하다 못해 폭발 일보직전이다. 각계로부터 전원 사퇴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예천군 특산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의원들은 요지부동이다. 그들은 군민들이 격하게 항의하는 가운데 부의장을 선출한 데 이어, 징계를 받아야 할 당사자들이 징계위를 구성하는 황당한 일까지 벌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주목할 것은 본회의 시작 전과 이후에 나타난 그들의 상반된 행태다. 본회의 시작 전 그들은 고개를 숙였고, 무릎을 꿇었다. 용서를 구하며 큰절까지 했다. 그러나 본회의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의원들은 자신들을 향한 엄청난 야유와 냉소에도 아랑곳없이 일정을 소화해 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한 그 '천연덕스러움'이, 그 '태연함'이 자꾸 눈에 거슬린다.

소나기를 일단 피하자는 심정일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것이다"라는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를 곱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씁쓸한 것은 지금껏 숱하게 목도해 왔던 우리 정치의 비루함을 떠올려본다면 이같은 의구심이 지나친 억측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벽이 의원들과 국민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면, 그 투명막을 사이에 두고 다른 세상,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면 정치는 더더욱 국민과 유리될 수밖에 없다. 적당히 짖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터다.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잘못된 관행과 문화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소리치고 또 소리쳐야 한다. 왜 그랬느냐고, 왜 책임지지 않느냐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 바람 언덕이 1인 미디어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세요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