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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노회찬의 숙원이던 '선거제도 개혁'..누가 가로막고 있나

"저에게는 오늘 맡게 된 이 정개특위 위원장 자리가 특별히 무겁습니다. 2004년 진보정당이 원내정당이 된 뒤 처음으로 주어진 위원장 자리이고, 또 제가 국회의원 3선을 하면서 맡게 된 첫 번째 국회직이기도 합니다. 그 소임이 다름 아닌 정개특위 위원장이라는 점에서 마치 숙명처럼 느껴집니다."

지난달 2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첫 회의 자리. 진보정당 사상 처음으로 국회 위원장 자리에 오른 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숙연하고 엄숙했다. 선거제도 개편의 막중한 사명을 안고 출범한 정개특위 위원장으로서의 책임을 그만큼 무겁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 오마이뉴스

심 위원장이 정개특위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을지 모른다. 불모지나 다름 없던 진보정치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사람, 영원한 정치적 동지인 심 위원장이 정개특위를 이끄는 장면을 누구보다 흐뭇하게 바라봤을 사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뛰었던 사람,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바로 그다.


노 원내대표는 지난 2004년 비례대표로 17대 국회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선거제도 개편과 비례대표제 강화를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강력히 주장해왔던 정치인이었다. 생전 마지막 여행길이 됐던 미국 방문 중에도 각 정당의 원내대표들에게 선거제도 개혁의 당위를 강조했을 만큼 남다른 애착을 드러내온 터였다. 

노 원내대표가 이처럼 선거제도 개편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현행 소선거구제의 한계와 폐해가 그만큼 뚜렸하기 때문이었다. 소선거구제는 표의 등가성을 훼손시켜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심각하게 왜곡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표'(死票) 논란을 끊임없이 야기시키며 국민의 의사가 현실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는 문제 제기가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노 원내대표는 지난 2016년 국회 비교섭단체 연설을 통해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2016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7.2%의 국민 지지를 받았으나 국회 의석수는 전체의 2%밖에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정당 지지율로 의석수를 배분할 경우 정의당은 21석(전체 의석수 300 X 지지율 7.2%)가량의 의석수를 확보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6석밖에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노 원내대표는 이어 "이번 지방선거에서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거나 현재 서울시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중대선거구제의 정신을 살려 4인 선거구를 제안한 데 민주당과 한국당이 당론으로 확정해주기를 요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가 표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소선거구제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당시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던 선거구획정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노 원내대표의 제안은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당 등 거대 양당의 기득권 방어 논리에 철저히 가로막혔다. 기득권 양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돼 있는 소선거구제를 양당 모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탓이다. 소선거구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은 실제 선거국면에 접어들면 감추었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의회 선거구획정 과정에서 보여준 양당의 '밥그릇' 지키기 행태가 그 비근한 예일 터다. 

지난 11월 7일 정개특위 3차 전체회의에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심 위원장이 "승자독식 선거구제로부터 가장 큰 기득권을 누려온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동시 결단"을 강력히 주장한 것도 이같은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는 결국 선거제도 개혁의 칼자루가 민주당과 한국당 두 거대 양당의 행동과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오마이뉴스


지방선거 참패 이후 한국당은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7월 2일 김성태 원내대표가 원내대책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선거구제 개편에 대해서 기존의 입장에 함몰되고 매몰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를 두고 지방선거에서 소선거구제의 무시무시함을 뼈저리게 체감한 한국당이 2020년 총선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선거제도 개편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그러나 오랫동안 소선거구제의 수혜를 받아온 관성이 쉽게 깨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한국당은 지난 7월 26일 정개특위 구성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음에도 위원 구성을 문제 삼으며 특위 출범을 두 달이 넘게 지연시켜 빈축을 샀다. 그런가 하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세로 돌아서자 최근에는 선거제도 개편에 다시 소극적으로 돌아선 듯한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다. 

선거제도 개편에 적극적이지 않기는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표면적으로는 선거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주도적으로 앞장서지 않고 있는 상태다. 지방선거에서 드러났듯 현행 소선거구제가 집권당에게 유리하다는 것이 여실히 입증된 데다가, 선거제도가 개편되면 지금보다 의석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흥미로운 것은 민주당도 과거 야당 시절에는 지금과는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주당 역시 지극히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선거제도 개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미 선거제도 개편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는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이를 감안하면 민주당이 보여주고 있는 미온적인 태도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 관행이 얼마나 뿌리 깊고 공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선거제도를 바꿀 수 있다면 나는 평생 국회의원을 안 해도 된다. 내가 여기서 물구나무라도 서겠다."

지난 9월 7일 '고 노회찬 의원 추모 문화제'에 참석했던 심 위원장이 노 원대표가 생전에 했던 말이라며 소개한 일화다. 선거제도 개편에 대한 노 원내대표의 뜨거운 열망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심 위원장은 노 원내대표의 발언을 소개하며 "반드시 선거제도를 바꿔 대표님의 유지, 정의로운 사회, 복지국가를 꼭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심 위원장은 이후 정개특위 위원장을 맡게 됐다.  

선거제도 개편이 국민의 의사를 정치에 제대로 반영하기 이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 원내대표가 의정 활동 내내 비례성과 대표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해왔던 이유였다.

노 원내대표의 숙원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지금이 선거제도 개편의 적기라는 각계각층의 지적과 요구가 잇따르고 있지만 정작 열쇠를 쥐고 있는 민주당과 한국당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노 원내대의 숙원은 여전히 난망이다. 오래된, 그리고 간절한 그의 꿈이 거대 양당 기득권의 카르텔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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