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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호남홀대론 내세우면서 호남출신 헌재소장 반대한 국민의당

ⓒ 오마이뉴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임명동의안이 11일 재석의원 293명 중 찬성 145표, 반대 145표, 기권 1표, 무효 2표로 부결됐다. 의결정족수인 147석에는 단 2석이 모자랐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충격에 빠졌고, 여소야대 국면의 현실을 정부여당에 각인시킨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국민의당 등 야3당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헌정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준안을 부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국민의당은 한껏 고무된 모양새다. 캐스팅보터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었다는 판단에서다.

당초 헌재소장 국회 인준안은 이변이 없는 한 통과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캐스팅보트를 쥐고있는 국민의당이 지역정서를 고려해 호남출신의 김 후보자를 완전히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등 보수야당의 강경 반대 기류 속에서도 청와대와 민주당이 인준안 가결을 낙관했던 이유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탈표가 없다는 가정 하에 이날 표결에 참여한 의원들의 투표결과를 각 당의 입장에 따라 분류해 보면 찬성표는 대략 130여표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민주당(120표)과 정의당(6표), 새민중정당(2표), 무소속인 정세균 국회의장과 서영교 의원 등을 합친 숫자다. 이를 기준으로 한국당(102표)과 바른정당(20표), 대한애국당(1표), 무소속 이정현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가정하면, 단순 계산해도 국민의당에서 21표 정도의 반대표가 나왔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반면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김 원내대표는 이날 표결 이후 기자들에게 "20~22명은 확실히 찬성한 것으로 보인다. 기권·무효표에서 민주당의 이탈표가 있지 않았겠나"라며 여당 책임론을 언급했다. 민주당이 표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인준안이 부결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김 원내대표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반대표가 18~20표는 되는 셈이어서 국민의당의 반대가 인준안 부결의 결정적 요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인준안이 부결된 데 대해 "존재감을 내려고 한 건 아니다"라면서도 "국민의당이 지금 20대 국회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어찌됐건 국민의당이 국회 의사결정에 캐스팅보트를 쥔 정당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국민의당의 향후 정국 운영 방향이 안 대표의 발언 속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인준안 부결로 확인된 캐스팅보터로서의 지위를 더욱 강하게 행사해 나가겠다는 뜻이다.

국민의당은 시쳇말로 '죽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대선 패배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터진 제보조작 사건으로 당은 존폐의 위기로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안 대표가 전면에 나섰지만 국면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새 당대표 선출에 따른 컨벤션 효과는 지극히 미미했고, 당 지지율 역시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이런 가운데 헌재소장 국회 인준 부결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국민의당은 이번 인준안 부결을 국면 전환의 모멘텀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작정 정부여당에 끌려가서는 당장 9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내년 지방선거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다. 양당 정치의 폐해 극복을 명분으로 창당한 국민의당은 민주당과 한국당 사이에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켜야만 하는 입장이다. 캐스팅보터로서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당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준안 부결은 안 대표의 정치적 행보와도 결이 닿아있다. 앞서 안 대표는 당대표 수락연설을 통해 강한 야당, 선명한 야당이 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정부여당에 협조할 것은 협조하겠다고 밝혔지만 안 대표의 취임 일성은 '더이상 정부여당의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대표 취임 이후 계속해서 문재인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국회 인준 부결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캐스팅보터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국면전환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인준안 부결이라는 '강수'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가변적'이다. 정치를 생물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인준안 부결로 확실하게 존재감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국민의당은 그로 인해 정치적 부담이 외려 커진 모양새다. 국민의당이 호남출신인 김 후보자를 낙마시킨 셈이어서 호남지역의 민심이반이 가속화될 개연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안 대표 취임 이후 국민의당이 정부의 호남지역 사회간접자본(SOS) 예산 삭감을 문제 삼으며 정치공세를 펴던 이른바 '신호남 홀대론' 역시 힘을 받지 못하게 될 전망이다. 호남출신인 김 후보자를 낙마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국민의당이 호남지역의 홀대와 차별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당착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인준안 부결 과정에서 국민의당이 한국당과 바른정당 등 보수야당과 힘을 합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김 후보자는 국가 공권력을 견제하고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소수의견을 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인준안 부결로 결과적으로 국민의당이 보수야당의 정치적 공세에 손을 들어준 꼴이 됐다. 인준안 부결에 따른 후폭풍을 국민의당이 떠안게 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이수 헌법재판소후보자의 국회인준표결이 부결되었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교각살우?"라는 의미심장한 글을 올렸다. '교각살우'는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힘쓰다가 큰 일을 망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박 전 대표는 '교각살우'의 의미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나 류영진 식품의약안전처장을 지키려다 김이수 후보자를 못지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김 후보자에 대한 인준안 부결되자 한국당은 우뢰와 같은 박수 속에 서로를 얼싸 안으며 자축했다. 그 장면은 고스란히 안방에 전달됐다. 덩달아 국민의당을 향한 시민들의 비난과 분노는 점점 비등해지고 있다. 인준안 부결 소식을 전하는 관련 기사마다 국민의당을 비판하는 댓글이 줄을 잇는가 하면, 국민의당 홈페이지 게시판 '국민광장'에는 인준안 부결을 주도한 국민의당을 성토하는 항의 게시글들로 빼곡하다. 국민의당이 이런 것까지 예견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론 돌아가는 모양새가 아주 심상찮다. 박 전 대표가 문 대통령을 겨냥해 비유했다는 '교각살우'는 어쩌면 국민의당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할 고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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