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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만약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한다면

정치권을 중심으로 '탄핵 기각설'이 확산되면서 탄핵 국면이 요동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확신한 야당이 '4말 5초' 벚꽃 대선의 부푼 꿈에 빠져 있던 사이, 전열을 재정비한 보수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지고 이에 고무된 박근혜 대통령 측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탄핵 기각 가능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핵 인용을 낙관하던 야당의 발등에는 불똥이 떨어진 모양새다. 탄핵 인용의 불확실성은 대선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던 야당의 자성을 이끌어냈다. 조기 대선보다 조기 탄핵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안팎에서 분출되고 있고,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오는 주말 촛불집회에 총동원령을 내린 상태다. 국민의당과 정의당, 바른정당 등도 조기 탄핵을 위해 당력을 끌어 모으는 한편, 특검법 개정안 처리 합의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갑자기 불거진 '탄핵 기각설'에 헌재 역시 적잖이 당황하는 모양새다. 헌재는 탄핵 심판과 관련한 갖가지 '설'들을 근거 없는 억측이라 못박았다. 이어 오는 22일까지 예정된 증인들이 출석하지 않으면 재소환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양쪽 대리인들에게는 23일까지 최종 입장을 정리해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논란이 일고 있는 '탄핵 기각설'에 선을 긋는 한편, 2월에 변론을 종결하고 3월에 선고를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박 대통령의 심판정 출석과 대리인단의 일괄 사퇴 등 변수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헌재가 탄핵 심판에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세간의 관심은 이제 선고 결과에 쏠리고 있다. 탄핵이 인용돼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압도적이지만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보수세력이 총집결하면서 탄핵 반대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고, 지난 9일에는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지낸 법조계 원로 9명이 탄핵절차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광고를 일간지에 싣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사회적 갈등과 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헌재가 탄핵을 인용할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한 가운데, 만에 하나 헌재가 탄핵을 기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것 하나는 확실할 것 같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그가 책임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운 대통령이 될 것이란 사실말이다. 정치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은 물론 심지어 법적 책임까지도 문제될 것이 없게 된다. 박 대통령이 확실한 선례를 남기게 되는 셈이니 그렇다. 왜 그런지 하나하나 따져 보자.


ⓒ 오마이뉴스


차기 대통령은 국민주권과 법치주의를 파괴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일급기밀인 공무 내용을 외부로 유출해도 상관없다. 국가 정책과 인사 문건, 정상회담 자료 등을 친한 지인에게 보여주어도 되며, 연설문 등을 첨삭지도 받아도 된다. 비선조직을 통해 각종 정책을 검토·추진해도 되고, 지인을 위해서 일감을 몰아주고 특혜를 베풀어도 된다. 누가 뭐라 하면 '공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에둘러대면 그만이다. 비선조직 자체를 문제삼는 경우에도 그냥 아는 지인이었다고 말하면 그뿐이다.


눈에 거슬리는 공직자가 있다면 마음대로 잘라버려도 된다. 비선조직의 요구에 토를 달거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면 "그 사람 아직도 있어요?"라든가, "참 나쁜 사람"이라고 '콕' 찝어 말하기만 하면 된다. 혹 언론이 이 문제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면 언론사 사주에게 압력을 가해 관련자의 옷을 벗게 만들 수도 있다. 기업의 팔목을 비틀어 거액의 뇌물을 공여하거나 수수해도 문제가 안 된다. 국가 경제를 부흥시키고 문화융성과 체육 유망주 육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둘러대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어디 이뿐인가. 국가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수백명의 국민이 수장되든 말든, 북한이 미사일을 쏘든 말든, 전염병이 창궐하든 말든 대통령은 책임을 질 필요가 전혀 없다. 평상시 하던대로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씻고, 외모에 신경써도 된다.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해도 관저가 곧 집무실이니 구태여 본관 집무실까지 가지 않아도 되며,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도 된다. 이를 문제 삼으면 오래돼서 통화기록을 못 찾겠다고 버티면 그뿐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최악의 경우 의회로부터 탄핵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 변호업무에 투철한 영혼 없는 대리인단을 구성해 탄핵 심판에 맞서면 만사형통이다. 자료 제출은 최대한 미루고, 증인 신청은 무더기로 하면서 시간을 최대한 끈다. 검찰과 특검 조사 역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협조할 필요가 전혀 없다. 대신 언론 인터뷰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여론전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다 보면 지지층이 결집되면서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는 비약이 아니다. 탄핵이 기각되면 선례가 생긴 셈이니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다. 비극이 따로 없다.

때 아니게 불거진 '탄핵 기각설'로 헌재의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졌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만큼 엄청난 부담과 압박을 느낄 터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기본으로,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수 국민이 헌재에 기대하는 것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다.

법은 사회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탄핵 기각설'이 불편하고 불쾌한 것은 그래서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며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무너진다면, 그래서 내가 배워온 상식이 다시 한 번 뒤집힌다면, 그동안 애써 억눌러온 자괴감과 분노를 나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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