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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재용에 대한 영장 기각은 공정한 것인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영장 기각의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법원에 대한 비판이 폭주하고 있는 가운데 영장을 기각한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에게 비난이 집중되는 모양새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법원이 2400원을 미납해 해고당한 버스기사의 해고무효 소송을 기각한 사실이 알려지며 공정성 논란도 일고 있다. 이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433억원에 달하는 뇌물을 공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극명한 대비를 묘사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이 부회장(433억원)에 대한 영장 기각과 버스기사(2400원)에 대한 판결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재력과 권력의 유무에 따라 사법부의 판단이 오락가락한다고 생각한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원칙은 무너진지 오래다. 힘 있는 사람에겐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만 추상같은 사법부 불신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청와대와 국회로 향했던 촛불이 사법부로 번질 기세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19일 오전 성명을 내고 "법은 평등하지 않았고 법원은 재벌 앞에 멈췄다"며 "사법부가 '돈이 실력'임을 입증했다"고 비난했다. 민주노총 역시 논평을 통해 "'법은 만명에게만 평등하다'는 조롱을 받아온 사법부가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며 "재벌체제 해체와 총수 구속은 촛불 혁명의 가장 절실한 요구가 돼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법률가들도 법원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이덕우·권영국 변호사,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법률가 60여명은 이날부터 25일까지 법원 정문 앞에서 릴레이 노숙 농성에 돌입한다. 권영국 변호사는 "'국민의 법상식에 어긋나는 결정을 하더라도 국민들은 어쩔 수 없다'는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농성 참여 이유를 설명했다. 이호중 교수 역시 "이재용 구속영장 청구가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등 한국 사회의 적폐를 청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분노한다"며 비분강개했다.

온라인 게시판과 소셜네트워크에서도 사법부를 향한 비난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조 부장판사의 과거 판결까지 도마위에 오르며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형국이다. 조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특검팀의 최순실씨와 안 전 수석의 수감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재청구를 기각했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가습기 살균기 사태와 배출가스 조작에 연루된 존 리 전 옥시 대표와 폭스바겐 박동훈 전 사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바 있다.



ⓒ 오마인뉴스


각계각층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지자 법원은 20일 공식 입장을 내놨다. 법원은 "건전한 비판을 넘어 과도한 비난과 신상털기 등으로 해당 판사의 명예를 훼손하고 부당한 비난과 부담을 주는 것은 재판의 독립뿐만 아니라 법치주의를 훼손할 우려가 있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사법부의 판단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은 수용하겠지만 도를 넘는 비난과 판사 개인에 대한 부당한 공세는 수용할 수 없다는  취지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사에 대한 근거없는 루머를 유포하거나 악의적인 비방을 하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법 판단의 '공정성' 여부다. 공정성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국민연금을 압박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 혐의를 인정받아 구속됐다. 그러나 정작 박 대통령과 이를 모의하고 그 수혜를 받아 경영권을 승계한 이 부회장은 불구속이다. 이 판결은 공정한가.


삼성은 승마 유망주 육성 명목으로 정유라 측에게 220억원 규모의 컨설팅 계약을 맺고, 그 중 80여억원을 지급했다. 그런데 이 계약은 법리에 문외한 일반인이 보기에도 지극히 비상식적이다. 삼성과 코레스포츠의 계약은 2015년 8월26일에 이루어졌다. 코레스포츠가 설립된 날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이것부터가 비정상적이다. 


계약서의 내용도 유령회사에 불과한 코레스포츠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성됐다. 이 부회장의 지시가 없었다면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계약을 삼성이 추진한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이 부회장이 직접 최순실씨에 대한 지원을 지시했다는 삼성 관계자의 진술까지 나온 상황이다. 이번 판결은 과연 공정한가.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헌법학자였던 게오르크 옐리네크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도덕의 기반 위에서 최대한 상식을 지키는 범주에서 법이 집행되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시민들의 분노는 이번 판결이 도덕과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아무리 사법부의 법리적 판단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433억원'과 '2400원'에 내려진 법의 잣대는 이중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기괴함이 서려 있다.

문제는 공정성이다.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 있는 그 공정성이 이번 판결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 우려를 표하기에 앞서 법원은 사법부에 '공정'을 기대해야 하는 부끄러운 현실을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법치주의 근간은 사법부에 대한 비난이나 비방 때문이 아니라 법이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무너진다.  최소한의 도덕이 법이라면, 법의 전부는 다름 아닌 '공정'에 있다. 법원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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