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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송민순 회고록 논란, 되살아난 색깔론의 망령

ⓒ 오마이뉴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을 둘러싼 파열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우병우 민정수석과 최순실씨,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 등으로 코너에 몰려있던 새누리당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고 있는 탓이다. 새누리당은 특히 야권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향해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이정현 대표는 "사실상 북한과 내통을 했다"는 원색적인 표현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장우 최고의원은 문 전 대표의 공개 사과와 함께 정계은퇴까지 거론했다.


이처럼 새누리당은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을 반격의 카드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전 통일부 장관이었던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김만복 전 국정원장을 비롯해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참여정부의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였던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등이 논란이 된 송 전 장관의 회고록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새다.



그러나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은 김장수 현 주중대사 마저 반박하고 있을 정도로 불확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18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박근혜 정부 들어 국가안보실장을 역임했던 대표적인 친정부 인사다참여정부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그는 송 전 장관의 회고록 내용 중 자신이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기술한 것에 대해 자신은 찬성 의견을 피력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김 주중대사의 주장은 참여정부 인사들의 일관된 입장과 함께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이 부정확하게 기술되었다는 또 다른 방증이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은 참여정부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 대해 북한에 사전 의견을 물은 뒤 기권했다고 기술한 회고록의 내용을 문제삼고 더불어민주당과 문 전 대표에게 맹공을 가하고 있다. "북한과의 내통", "종북이 아닌 종복", "정계은퇴", "김정일 부자의 아바타" 등 살벌하고 극단적인 수사를 동원하고 있는 것만 봐도 새누리당이 얼마나 이 문제에 당력을 집중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 모습은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사생결단으로 물고 늘어졌던 'NLL 논란'의 데쟈뷰다. 논란이 촉발된 배경과 의도에서부터 진행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닮아도 너무 닮아 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수사를 동원해 사실관계를 날조·왜곡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무차별 폭로전을 통해 여론을 호도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도모하려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 오마이뉴스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하겠다"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며 문재인 후보를 공격했다.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진 이 희대의 날조극에는 당시 새누리당의 정문헌, 김무성, 서상기 의원과 권영세 선대위 종합상황실장, 그리고 박근혜 후보가 가세했다. 그들은 연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며 대선 정국을 이념대결과 색깔론으로 분칠했다



당시 새누리당은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인식 논란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여기에 새누리당이 관계된 불법선거운동 의혹인 '십알단 사건'과 국정원 여직원의 불법댓글 사건 등의 악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끝까지 NLL 이슈를 부각시키기에 골몰했다. 색깔론은 국면을 뒤흔들 전가의 보도요, 지니의 램프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흐름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심각한 과정의 문제가 있었지만 결과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NLL 논란'은 대선 이후에도 새누리당과 박 대통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대선 이후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의 증거들이 드러나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 여론이 빗발치자 새누리당은 또 다시 'NLL 논란'을 꺼내들며 맞불을 놓았다. 이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폐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초 폐기' 논란까지 곁들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과 '사초 폐기' 지시 주장은 모두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결과적으로 새누리당과 박 대통령은 있지도 않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과 '사초 폐기' 논란을 대선과 대선 이후 정국 타개용으로 철저하게 악용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당시 거짓과 조작, 저열한 정치공세를 남발했던 이들 중 아직까지 사과를 하거나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송 전 장관의 회고록 내용을 문제삼고 이를 정치쟁점화하고 있는 새누리당의 행태는 그 당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견해와 입장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동안 부처간 당사자간 갈등과 이견이 생길 수도 있다. 최고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따라 국가 정책이 좌지우지되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닌 이상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사 결정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통상적인 정책 결정 과정조차 새누리당을 거치면 '국기문란'으로, '주권포기'로 날조되고 왜곡되어 버리고 만다.


새누리당이 다시 색깔론을 꺼내든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 논란, 최순실·정유라·차은택 의혹, 미르·K스포츠 재단 의혹 등이 연달아 터지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했을 터다.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 앞서 참여정부가 북한의 입장을 물은 뒤 기권을 했다는 취지로 기술한 송 전 장관의 회고록 내용은 이를 위한 회심의 카드였을 것이다. 색깔론이야말로 새누리당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국면 전환의 상수 중의 상수가 아닌가.


1950년대 초반 미국의 상원의원이었던 조세프 매카시가 "미 국무부 내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폭로한 이후 미국 사회에 광풍처럼 몰아닥쳤던 매카시즘은 그러나 50년대 중반 매카시의 주장이 허무맹랑한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소멸의 길을 걸었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는 기껏해야 3~4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세기도 훨씬 전에 사라진 냉전시대의 유물이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맹위를 떨친다.


아찔하고 섬뜩하다. 대한민국 정치의 비정상성과 저열함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또 있을까. 달리 이 나라가 남북으로 쪼개진 채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송 전 장관의 회고록 내용을 색깔론과 접목시키는 새누리당의 관성 속에는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 하나가 스며 있다. 새누리당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색깔론이 분단체제의 부스러기를 먹고 자란다는 점이다. 사상을 강요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일을 애국이라 착각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권력을 잡고 있는 한 이 나라는 50년 뒤에도, 100년 뒤에도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평화적인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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