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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통령의 원칙과 신뢰는 여전히 유효한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말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는데, 요즘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에 대해 여러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SNS 등을 통해 퍼지는 이런 잘못된 유언비어를 바로잡지 않으면 개혁의 근본취지는 어디로 가버리고 국민 혼란만 가중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통령의 발언은 코레일의 자회사 설립과 원격진료 제도 도입 및 의료법인 자회사 설립을, 철도와 의료 부분의 민영화라 비판하는 여론을 겨냥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박 대통령이 자신과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 


본디 유언비어란 근거없이 떠도는 말이란 뜻이다. 대통령의 발언이 알려지자 온라인을 중심으로 박 대통령이야말로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마구 양산해낸 장본인이라는 비아냥이 잇따랐다. 이를 증명하는 각종 증거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65세 이상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20만원씩 주겠다는 공약부터 시작해서, 4대 중증질환 100% 국가 책임, 무상보육 시행, 의료비 본인부담 상한 50만원으로 인하, 지역간 의료격차 해소, 군복무기간 18개월로 단축, 고등학교 무상교육 실시, 대통령 측근 친인척 비리 상설특검제 실시, 책임총리 책임장관제 실시, 쌍용자동차 국정감사 실시, 소득연계 반값등록금 실시 등 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 당시 내걸었던 각종 공약들이 줄줄이 엮여 나왔다.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다"며 자신있게 내걸었던 공약들은 박 대통령의 표현을 빌자면 국민 혼란만 가중시키며 난무하는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았다.  






박 대통령에게는 그동안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 다녔다. 아마도 이명박 정부 시절 세종시 수정안에 원안 고수로 맞서며 원칙을 지켰던 것과 한나라당 대표와 비대위원장을 거치는 동안 위기에 빠진 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당안팎의 신뢰가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이후 원칙과 신뢰는 박 대통령 스스로도 훈창처럼 여기는 소중한 정치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박 대통령은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때마다 원칙과 신뢰를 정치철학으로 내세우며 정면돌파를 시도해 왔고, 2012년 7월10일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그동안 정치를 해오면서 손해가 되더라도 한번 드린 약속은 반드시 지켜왔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싸워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기간 동안 표를 의식해 유권자들에게 공약을 해 놓고도 선거 이후에는 책임지지 않는 정치권의 행태들을 거듭 비판했고, 국민들 사이에 만연된 지독한 정치불신을 해소하고 새 정치를 향해 나아가려면 약속을 반드시 지켜 국민과의 정치적 신뢰를 쌓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위에 열거한 공약들이 바로 박 대통령의 정치철학인 원칙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원칙과 신뢰는 깨지기 일쑤였고, 소통과 포용은 없는 독단과 독선의 리더십만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선거가 끝나면 나몰라라 하는 정치인의 무책임을 비판하던 박 대통령은 어느새 그들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복지공약 중의 하나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해 '상시·지속적 업무 정규직 고용관행 정착' 등 비정규직 고용 관행 개선을 약속한 바 있다. 이 공약은 상시적이고 지속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실질적인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공공부문은 2015년까지 상시·지속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며, 대기업의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을 유도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을 위한 이 공약 역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언론은 어제 정부가 기업의 비정규직 고용기간 제한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골자로 한 '비정규직 고용개선 종합대책'을 이르면 다음 달에 발표할 것이라 보도했다. 이 대책은 기업들이 정규직 전환 시점인 고용기간 2년을 채우기 직전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결과적으로 현행 기간제법이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기간제법'을 고쳐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3년으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국민혼란을 가중시킬 유언비어에 노동계는 즉각 반발했다. 정부가 내세운 근거도 빈약하고 내용은 오히려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을 위함이 아니라 비정규직 계약기간을 늘려달라던 재계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계획 중인 '비정규직 고용개선 종합대책'은 조삼모사식 탁상행정의 표본이라 불러야 할만큼 엉성하기 그지없다. 2년의 시한을 1년 연장한들 열악한 노동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이번 대책은 애초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공약했던 내용과도 판이하게 다르다. 비정규직이 노동 근로자의 절반에 이르는 최악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실질적인 고용안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재계를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정부는 노동현실을 외면한 채 또 다시 기업의 충실한 우군임을 천명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논평은 노동계의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불신의 밀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민주노총은 이날 논평을 통해 "노동부는 애매한 말로 얼버무릴 것이 아니라 '기간 연장은 추진하지 않겠다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또 노동계의 의견을 듣고 있다는데 누구에게 무슨 의견을 듣고 있다는 말인가"라며 정부대책을 비난했다. 민주노총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박근혜 정부는 최소한 공공부문부터 상시•지속적 업무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만이라도 지켜야 양심이 있는 것 아닌가"라며 "노동자 등 약자의 등을 치고 기만하는 정부의 술책은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라는 격정과 울분 속에 노동계의 비참한 현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인 노동현실은 재앙에 가깝다.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 등의 신조어는 대한민국 노동환경의 취악함을 상징하며 사회문제로 대두된지 이미 오래다. 불평등한 근로조건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늘어만 가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선거철에만 정치권의 관심사항에 들어갈 뿐 선거만 끝나면 늘 찬밥신세로 전락하기 일쑤다. 민주노총이 논평을 통해 요구한 '공공부문의 상시•지속적 업무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공약도 사실 지난 대선이 아닌 지난 총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내세운 공약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총선 공약이 대선 공약으로 조금더 세밀하게 다듬어졌을 뿐 정치인들이 지키지도 않을 유언비어를 앵무새처럼 배설해내는 풍토와, 졸속행정과 각종 거시경제지표 등을 통해 국민을 기만하는 술책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비근한 예로 박근혜 대통령의 주문으로 늘어난 시간제 일자리가 훗날 고용율 70%달성이라는 대통령의 성과로 치장될 수는 있겠지만, 노동자에게 시간제 일자리는 최저임금으로 겨우 연명하는 시간제 인생을 양산하는 냉혹한 현실에 불과할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나타나고 있는 모습들은 거의가 이런 식이다. 약속을 지키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다고 미안해 하지도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 정권 차원의 공약파기와 그에 따른 논란들은 항상 있어 왔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이번 정부처럼 뻔뻔한 적은 일찌기 없었다. 


박 대통령이 집권한 지도 이제 2년이 다 되어 간다. 필자는 '박 대통령의 원칙과 신뢰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가 궁금하다. 여전히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겠고, 두 손 들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가치판단의 기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필자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타박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원칙과 신뢰'란 오랜 세월을 거쳐삶이 만들어낸 빛나는 보석같은 것이다. 따라서 미혹한 것들로부터 정의와 양심을 지켜온 사람들, 유혹과 탐욕을 멀리하고 사회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온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의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두자. 저 숭고하고 존귀한 수사가 저리 마구 남용되고 도용되어 진다면 이는 '원칙과 신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욕이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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