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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노무현, 노회찬의 꿈이 사라져간다

ⓒ 오마이뉴스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국회 정개특위와 개헌특위가 가동 중인데 특히 어떤 과제가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망설임 없이 '선거제도 개편'이 더 시급하다고 단언했다. 지난 2017년 12월 초 노 원내대표가 <레이더P>와 가진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민심 그대로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현행 선거제도가 바뀌어야지 개헌도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개헌을 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한이 국회로 온다고 해도 국회의원이 제대로 선출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선거제도를 개혁해서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합니다."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 일부를 의회로 분산시킨다 해도 현재의 국회 수준을 감안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노 원내대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종식시키기 위한 권력구조 개편은 국민의 의사를 정치에 제대로 반영시킬 수 있는 합리적 선거제도를 구비한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그 이유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터다. 국회는 국가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언제나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다. 

노 원내대표가 의정 활동을 하는 내내 역점을 두어 온 것이 바로 '선거제도 개편'이다. 지난 2월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도 노 원내대표는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에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그 토대 위에서 공정한 사회도 가능합니다"라고 힘주어 강조하기도 했다. 

선거제도 개편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저의 제안은 여러 가지이지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우리 정치의 구조적인 결함을 바로 잡아서 정치를 정상화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생산적인 정치로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에) 권력을 이양하는 대신에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지역구도를 제도적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선거제도를 고치자는 것입니다. 굳이 중대선거구제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어떤 선거제도이든 지역구도를 해소할 수만 있다면 합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2005년 7월 28일 노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대연정 공식 제안 서신'에 나오는 내용이다. 노 전 대통령이 진보와 보수 양쪽의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연정을 주장했던 이유는 선거제도 개편이 분열과 대립의 정치구조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선거제도 개편 의지는 2010년 출간된 자서전 <운명이다>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노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번 잡는 것보다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고 할 만큼 선거제도 개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만큼 현행 선거제도가 불합리하고 불정공하다기 때문이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기득권 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 특히 지역주의와 결합해 양당체제를 고착화시켜 소수정당의 원내진입을 어렵게 만든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창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셈이다. 

특히 소선거구제는 1위 이외의 표들은 모두 사표가 되기 때문에 민의를 왜곡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유권자의 표심이 심각하게 왜곡될 뿐만 아니라 대표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밖에도 선거 과정을 혼탁·과열시켜 수많은 부작용을 양산하는 등 현행 선거제도의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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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안으로써 주목받는 것이 바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정당 득표율만큼 의석수를 배분해 선거에 드러난 표심을 의회 구성에 그대로 반영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20대 국회 역시 이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위원장 심상정 정의당 의원)가 꾸려졌지만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선거제도 개편에 대한 각 당의 셈법이 제각기 다른 탓에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잇따른 비판에도 현행 선거제도가 30년이 넘게 유지돼 온 데에는 자유한국당의 반대가 컸다. 선거제도를 바꾸는 일은 결국 거대 정당이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행 소선거구제의 수혜를 톡톡히 누려온 한국당으로서는 선거제도를 손 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선거제도 개편 논의가 있을 때마다 그들은 한사코 반대 입장을 고수해왔다. 

한국당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건 지방선거 이후다. 선거에서 굴욕적으로 참패하면서 입장이 달라진 것이다. 소선거구제의 무시무시함을 체감한 한국당은 차기 총선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비례성을 보장하는 선거제도를 수용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한국당이 전향적 태도를 보이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최상의 여건이 조성됐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야3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적극적인 데다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역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당론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선거제도 개편 의지가 강하다. 민주당이 야3당과 함께 한국당을 압박한다면 정치권의 오래된 숙원이 마침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던 배경이다. 

그러나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광역·기초단체장, 의회를 싹쓸이하다시피 한 민주당은 이후 선거제도 개편 논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야3당이 목소리를 높이고 독려를 하고, 천막 농성까지 해가며 압박을 해봐도 무용이다. 

의원 정수 확대 문제나 선거제도 개편의 내용과 방법 등과 관련해 국민 여론과 각 당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 더 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민주당의 속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유리한 상황에서 굳이 손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일 터다. 더욱이 차기 총선을 염두하면 소선거구제는 포기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다. 과거 한국당이 그래왔던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나 어느 구름에 비 올지 모르는 게 정치다. 최저임금 인상과 소득주도성장 논란으로 경제와 민생 문제가 부각되고, 서울교통공사 채용비리 의혹, 청와대 기강 해이 등 각종 논란이 잇따르면서 꺾일 줄 모르던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민주당 역시 '더불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사이 한국당은 손바람을 내고 있다. 지지율이 오르면서 지방선거 이후 반짝 내비쳤던 전향적인 태도 역시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번 해 볼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긴 탓일 게다. 

앞일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민주당의 호시절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선거제도 개편을 위한 '골든타임'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이라던 노 원내대표와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번 잡는 것보다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던 노 전 대통령의 꿈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민주당이 선거제도 개편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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