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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의의 보루 사법부? 범죄물의 소재나 아니면 다행

영화가 따로 없다. 이쯤되면 범죄물이 넘쳐나는 영화의 소재로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왜 아니 그럴 텐가. 스폰서 검사와 경찰, 정치권과 재계가 얽힌 검은 치부와 부조리 등은 이미 수도 없이 반복·재생돼 온 한국 영화의 단골 메뉴가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작금의 상황은 소재 고갈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영화업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양승태 사법농단' 얘기다.


ⓒ 오마이뉴스

"이게 재판거래의 대상이 되는 사건, 그 사건과 관련한 문건들이 있으니까 검찰에 불려가서 그 문건이 있다는 걸 인정했어요. 그리고 그 문건을 파기하지 않겠다고 서약도 썼어요. 그런데 나오자 마자 파기를 해 버린 겁니다." (김어준)


"네, 그래서 검찰이 절차에 따라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한 건데요. 법원이 사흘 동안이나 그것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가 사흘 후에야 겨우 기각 판정을 내렸거든요." (김은지 시사IN 기자)

"그 사이에 총 세 번 기각을 했어요. 이 문건의 존재를 확인하고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하려고 하니까 법원이 기각하고 그 기각 세 번 하는 사이에 그 문건들을 다 파기해 버린거죠. 이게 당연히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압수수색 영장이 나왔죠. 90%가 나오니까요. 그런데 사법농단과 관련해서는 90%가 기각되고 있습니다, 현재 거꾸로. 그리고 검찰이 문서의 존재를 확인했어요. 파기하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했어요. 얼마나 파기할 것 같으면 파기하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받았겠습니까. 받았는데 돌아가자마자 파기해 버렸어요." (김어준)

"네, 그러면서 이렇게 핑계대고 있는데요. 검찰이 끊임없이 자기를 압박할 것을 예상해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어차피 법원에서도 범죄가 안 된다고 한만큼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라는 주장인 건데요." (김은지 기자)

"문제가 없는데 왜 파기합니까, 앞뒤가 안 맞죠. 이거 보통 사람은 다 구속 사유예요. 네, 이 자체가 구속 사유입니다." (김어준)

"모두 고위법관 출신들입니다. 모두 법을 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인데 오히려 법을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은지 기자)

12일 방송된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 1부에서 김어준 공장장과 김은지 기자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유해용 전 대법관 수석재판연구관을 둘러싼 법원의 행태와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법원이 증거인멸을 방조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이유와 '양승태 사법농단' 수사 방해 의혹에 휩싸여 있는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유 전 수석연구관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 사이의 재판거래 의혹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그가 퇴직하면서 대법원의 기밀문건 다수를 반출했다. 이 사실을 파악한 검찰이 관련 사실을 추궁하자 유 전 수석연구관은 증거를 인멸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그러나 그는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는 사이 관련 문건을 파쇄하고 컴퓨터 하드드라이브 역시 파기시켰다. 이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범죄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압수수색영장을 기각시킨 박범석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와 유 전 수석연구관 사이의 관계다. 박 판사는 2014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한 전력이 있다. 대법원 조직체계상 재판연구관실 업무를 총괄하는 선임연구관이었던 유 전 수석연구관 휘하에 있었던 것이다. 박 판사의 영장 기각에 세간의 시선이 따가운 이유다. 두 사람의 과거 이력이 영장심사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미 '양승태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이 번번이 기각되면서 법원의 공정성에는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법조계와 검찰 등에 따르면 검찰이 사법농단 수사로 법원에 청구한 압수수색영장의 기각률이 무려 9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사법농단 의혹의 중심에 있는 법원행정처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은 50여건이 모두 기각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해 법원의 압수수색영장 기각률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는 과거의 사례와 비교해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2017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청구된 압수수색영장의 발부율은 89.2%에 달했다. 기각률 90%와 발부율 89.2%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상식적으로 납득할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법원의 잇따른 영장 기각에 법조계 내부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영장기각 사유 역시 석연찮다. 법원이 밝힌 기각 사유는 "일개 심의관이 작성한 문건에 따라 대한민국 대법관이 재판한다고 보기 어렵다", "행정처 문건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 "주거권을 침해할 만큼 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 "공무소 압수수색은 임의제출을 선행해야 한다" 등이다. 그러나 고구마 줄기처럼 불거져 나오고 있는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시민의 분노를 해소하기에 이 짧은 문구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법원을 향해 '제식구 감싸기'라는 비난이 폭주하는 이유일 것이다. 


ⓒ 오마이뉴스


"가장 존경받고 가장 신뢰를 받아야 할 법관들이, 사법부가 지금 '공범이다' 이런 말을 들을 만큼의 심각한 상황으로 갔으니 적어도 이것을 수장인 대법원장께서 책임지고 나서셔서 확실하게 해결해 주셔야 되겠죠. 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그 점에 관해서 솔직히 말해서 좀 미흡하다.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12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천정배 민주평화당 의원은 김명수 대법관을 향해 저와 같이 쓴소리를 날렸다. '양승태 사법농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정황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사법행정의 전권을 쥐고 있는 김 대법원장의 '침묵'을 비판한 것이다. 천 의원의 지적처럼, 사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김 대법원장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실망스럽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애초 사법농단 수사에 적극 협조할 것처럼 말했던 김 대법원장은 시간이 갈수록 그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 세간의 빈축을 샀다. 대법원은 사법농단 관련 자료와 파일 등의 검찰 제출을 거부하는가 하면, 법원내 자료 열람 역시 불허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법원내 자료 검색과 복사를 허용했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강력한 자성을 통한 파일 영구 삭제)되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퇴직판사들의 이메일 계정이 삭제되는 등 관련 자료 상당수가 파기된 뒤였다. 

이미 세 차례에 걸친 법원 내부 특별조사단의 수사만으로는 사법농단 사태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상태다. 사법농단 사태가 검찰 수사로까지 이어지게 된 실질적인 이유였다. 사법부의 위상과 신뢰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김 대법원장의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김 대법원장은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침묵하고 있는 중이다. 

사법부의 추락을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찹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사법부의 추악한 민낯에 국민적 공분이 거세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침묵은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김 대법원장은 지금이라도 '양승태 사법농단' 실체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과감한 결단과 특단의 조치로 사법부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야 한다. 정의의 최후의 보루라 여겨져 온 사법부가 범죄물의 소재로 쓰여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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